"오늘은 참 기분 좋은 날입니다."
청바지에 머플러를 두른 남자는 사뭇 들떠 있었다.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양재동 주택가에 있는 구룡사에서는
20대 청년 네댓 명이 구슬땀을 흘리며 이삿짐을 나르고 있었다.
마침 이날은 신시컴퍼니가 10년 만에 건물을 사서 `독립`하는 날이었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50)는 "직원들이 편히 일할 공간을 하나 갖고 싶었는데,
드디어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5층짜리 새 보금자리는 옛집인 구룡사와 길 하나를 두고 이웃해 있었다.
유독 눈에 띄는 짙은 붉은색 건물을 보며 그는 연방 허허 웃었다.
`땅끝마을 촌놈`이 20여 년 만에 더 큰 꿈을 쌓아올릴 토대를 얻은 것이다.
새 집의 첫 손님이 돼 한국 공연계 과거와 현재의 증인인 그를 만났다.
인터뷰 전 2층에 차려진 고사상에 들러 머리를 숙이고 나니 스님 한 분이 들어오셨다.
구룡사 회주 정우 스님이었다.
박 대표에게는 평생의 은인인 분이다
아직 정리가 안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축하 손님이 왔다.
그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배우 손숙 씨는 "더 크게 불같이 일어나야지"라며 봉투를 건넸고,
축하해주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지방의 국회의원 당선자도 있었다.
그는 참 인복이 많았다.
-공연인으로서 잠깐 정치권에 외도(?)했는데, 경험해보니 어땠나요.
(그는 4ㆍ11 총선 때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이었다.)
▶공심위원을 하기 전에는 저도 일반인과 똑같이 정치, 정치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뭐, 다들 쉽게 정치인에 대해 욕하듯이 말입니다. 근데, 막상 공심위원 하면서 여러 정치인을 만나 보니
진짜 나라를 위하는 분이 많았어요. 여야 모두 말입니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다르더라고요.
약간의 희망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문화ㆍ예술계에서는 제가 중간 세대다 보니 정치 한번 해봐라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냥 인생 공부했다고 칩니다.
-연극인으로 시작해 뮤지컬 프로듀서로 성공했는데, 프로듀서와 연극인 중 어떻게 불리길 좋아합니까.
▶뮤지컬은 연극의 한 장르입니다. 둘을 굳이 구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목표는 딱 하나,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겁니다. 연극판이 어려웠던 작년에도 `레드` `산불` `피아프` 등 연극을 더 많이 했습니다. 제게도 고집이 있습니다. 요즘 뮤지컬은 아이돌 스타를 많이 출연시키는데, 우리만큼은 기존의 전문 뮤지컬 배우로 작품성을 인정받자는 거지요. 아이돌 스타를 쓰면 출연료에 거품이 낍니다. 죽어라 하고 연극과 뮤지컬만 해온 배우들은 큰 상처를 받습니다. 저는 작품을 잘 만들면 손님은 극장을 찾게 돼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작품을 잘 만드는 게 최고의 홍보 마케팅이지요.
-대학로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데, 대안은 없을까요.
▶좋은 예술가는 100석도 안되는 작은 무대에서도 실험적이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발산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20ㆍ30대에는 실험적인 정신으로 경험을 축적해가는 시기고, 그렇게 중극장을 거쳐 50ㆍ60대에는 대극장에 오를 수 있는 게 공연예술입니다. 공연은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면 안됩니다. 좋은 작품이 돈이 되는 게 이치지요. 대학로가 살기 위해서는 트렌드를 좇기보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이 많이 쏟아져야 합니다.
-1년에 몇 차례나 브로드웨이를 다녀오는데, 아직도 배울 게 많습니까.
▶그들은 아직도 리딩(readingㆍ대본 읽기) 공연으로부터 시작해요. 또 몇 년 동안 수많은 워크숍을 통해 보완하고 방향을 바꾸고, 그렇게 만들어서 브로드웨이에 진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달랑 극장 먼저 빌려놓고, 정해진 기간에 작품을 뚝딱 만들어 올리잖아요. 그런 프로페셔널하고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을 배워야 합니다.
-두 번이나 큰 실패를 겪고 오뚝이처럼 일어났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요.
▶`갬블러`(1999년)의 앙코르 공연 실패 때는 전세자금을 빼서 빚을 갚았고, `댄싱쉐도우`(2007년)는 45억원이나 쏟아부었는데 실패했지요. 이젠 웬만한 실패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하. 실패해보지 않은 사람은 물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못 나오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동안의 실패는 남들이 엄두도 못 낼 일을 하면서 경험한 거라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성공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성공은 항상 그런 두둑한 배짱의 결과거든요. 크리에이티브한 동네에선 도박이라고 할 만한 역발상 없이는 큰 성공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렌트` `맘마미아` `아이다` `시카고` 등 히트작이 많은데, 좋은 작품을 고르는 비결이 있습니까.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매번 올리기 전엔 실패할 거란 얘기를 먼저 듣습니다. 한국은 아직 뮤지컬 역사가 짧아서 쇼적이고 오락적인 작품이 잘되는 편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올리지 않았던 스타일의 기발한 아이디어, 젊은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작품을 올려왔습니다. 그리고 볼거리보다는 드라마, 스토리 중심의 뮤지컬을 많이 해왔죠. 음악의 완성도는 기본이고요. 프로듀서가 하는 일은 관객이 보고,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적절한 시기에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용하게 맞아떨어져 히트했다고나 할까요.
-그동안 만든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작품마다 사연이 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렌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연 당시 한국 뮤지컬 여건으로 봐서는 혁신적인 작품이었죠. 동성애, 에이즈, 마약과 같은 금기시되는 소재를 다루고, 록음악이 바탕이 된 작품이었으니…. 다들 망할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미쳤다`는 말에 더 오기가 나서 무모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성공을 거뒀고, 국내 공연계의 흐름도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박칼린 음악감독과는 오랫동안 작업해왔는데, 서로 잘 통합니까.
▶칼린(그는 이렇게 불렀다)과는 오누이 사이지요. 미국으로 떠나려는 걸 한국에 주저앉혀서 `대한민국 1호 음악감독`으로 만들었습니다. 함께 13년 동안 작업을 하면서 한번도 의견이 부딪친 적이 없었어요. 신인을 과감하게 기용한다든가, 실험적인 작품에 도전한다든지. 이런 일들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못합니다. 그는 음악과 소리를 가장 잘 끄집어내는 마술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일할 때는 열정적이고 굉장히 카리스마 넘치고, 리더십이 돋보이지만 사실은 천생 여자고 마음이 여린 친구입니다.
-신경숙의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를 연극과 뮤지컬로 만들었는데, 다른 계획이 있습니까.
▶연극은 두 달씩 두 번을 올렸는데, 반응이 열광적이었습니다. 모녀가 같이 손잡고 와서 펑펑 울어요. 뮤지컬도 관객이 좋아했습니다. 그때 `아 관객에게 먹히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글로벌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해외 스태프에게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온 `맘마미아` 프로듀서, 미국 프로듀서들도 죄다 원작을 마음에 들어했어요. 마침 미국에서 영어 버전이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그래서 `Please Look After Mom`이란 이름으로 뮤지컬을 다시 만들기로 최근에 계약했습니다. 쟁쟁한 사람들이 달라붙습니다. 작곡은 `유린 타운`으로 토니상을 받은 작곡가 마크 홀먼이 맡습니다. 브로드웨이 스태프가 작품을 쓰고 만들어서 미국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우리는 제작만 합니다. 한국 작품을 원작으로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이 만들어지는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음악과 대본이 완성되면 번역해 내년 초에 국내에서 먼저 올리고 곧바로 뉴욕으로 갈 겁니다. 늦어도 2013년 11월쯤에는 개막합니다. 얼마 전 신경숙 작가에게 이 얘기를 전하니 앉은 자리에서 와인 한 병을 다 마시는 겁니다. 너무 좋아했어요.
-내년 가을에 올리는 `사랑과 영혼(Ghost)`은 어떤 작품이지요.
▶데미 무어, 패트릭 스웨이지가 나왔던 영화 `사랑과 영혼`의 뮤지컬 버전인데, 제작비만 130억원인 대작입니다. 근래에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빌리 엘리엇` 이후 가장 핫(hot)한 뮤지컬이지요. 예매율이 100%를 넘어요. 무대에서 저런 장면이 가능하나 싶을 정도로 무대 메커니즘이 굉장해요. 거 있잖아요.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패트릭 스웨이지가 죽어서 영혼이 돼 지하철을 넘나드는, 그런 장면이 LED로 무대에서 펼쳐집니다. 사랑 얘기라는 점에서 젊은 층도 좋아할 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5년 동안 한국에 이만한 대형 작품이 나올까 싶습니다.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학교폭력을 다룬 연극을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란 학교폭력 고발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청소년들이 걱정이 돼서 만든 작품입니다. 작품에는 피해자 부모와 가해자 부모만 나오고 학생은 안 나옵니다. 극에서는 가해자 부모가 자기 아이의 죄를 숨기려고 자살한 아이의 유서를 불에 태워서 먹어버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1월에 낭독 공연을 보고 그날 바로 작가와 구두 계약을 했습니다. 무조건 이 시대에 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죠. 6월 24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올라가는데 영화 제작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영화 `도가니`가 던진 것처럼 사회에 파장을 주고 싶습니다. 예술이 사회에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이라 생각합니다.
■ 김상열ㆍ정우 스님ㆍ차범석…지금의 나를 만든 은인들
1982년 단역배우로 연극에 입문한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의 첫 은인은 당시 `연극계 거물`이었던 김상열 극단 신시 대표(1941~1998년)다.
스타가 즐비했던 `김상열 사단`에서 그는 배우로서는 입지가 좁았다. 그는 스승의 충고에 따라 자신의 길을 기획자로 틀었다. 극단 살림을 맡을 당시 스스로 `꾸지람계의 이단아`였다고 회상할 만큼 자주 혼이 났다.
하지만 그에게 덜컥 뮤지컬 기획을 맡긴 사람도 김상열 선생이다.
본고장 뮤지컬을 몰래 베껴 쓰는 풍토가 만연했던 1990년대. 저작권을 처음으로 사와 만든 작품이 1998년 `더 라이프`다.
한국 공연계를 도둑으로 알고 있던 브로드웨이와 줄다리기 협상 끝에 처음으로 정식 계약을 하고 올린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브로드웨이 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김 선생은 이듬해 작고했지만 투병 중에도 그가 제작하는 작품 연출에 직언을 할 만큼 열정을 쏟았던 분이다. 1999년 그는 스승의 극단 신시를 물려받아 신시뮤지컬컴퍼니를 세웠다.
양산 통도사 주지 정우 스님과의 인연은 극단 신시에서 조연출을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뮤지컬 `님의 침묵`을 제작하며 스님을 처음 만난 것. 매일같이 관객을 모시고 공연을 보러 오던 스님은 이후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1989년 구룡사가 완공되자 지하 1층에 사무실을 내줘 이후 극단 신시의 보금자리가 됐다.
박 대표가 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시절, 그의 가슴에 불을 지른 건 차범석 선생(1924~2006년)의 `산불`이었다.
그는 6ㆍ25전쟁의 아픔을 그린 `산불` 덕분에 연극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한국인의 산불을 세계인의 산불로 만드는 걸 필생의 업으로 여겼던 그가 `산불`을 원작으로 뮤지컬(댄싱쉐도우)을 만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공연계에서 일하며 그는 작품의 고비마다 차범석 선생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명절 때면 그에게 위스키 두어 병과 고향 갈 여비까지 쥐여 주시던 분을 그는 `연극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세 사람과의 인연에 대해 "나는 참 복이 많다. 훌륭한 어른들 밑에서 인생을 배우고, 연극을 배우고, 어려울 때 헤쳐나가는 삶의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 He is…
박명성은 1963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 서석고, 서울예술대학 무용과와 단국대 연극영화과, 단국대 대중예술대학원 석사를 마쳤다. 1982년 극단 신시의 창단멤버로 활동했다. 그 후 10여 년간 조연출, 무대감독을 거쳐 1999년부터 신시컴퍼니 대표를 맡고 있다. 2001년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문화부장관상), 2010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상)을 받았다. 현재 서울연극협회장과 명지대 영화ㆍ뮤지컬학부 전임교수를 맡고 있다.
[대담=황국성 문화부장
정리 = 김슬기 기자
사진 = 김호영 기자]
기사입력 2012.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