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통도사 미주분원 포틀랜드 보광사
유학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미국으로 건너온지 3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회주이신 정우 큰스님,
뉴욕 원각사 주지 지광스님,
L.A 태고사 주지 무량스님
그리고 불자님들의 배려와 관심으로
모든 일들이 원만히 진행되어,
비교적 무장무애하게 정진을 할 수 있었다.
주위 분들께 보은하는 마음으로 그간 미국에서
보고 느낀 점들을 글로 간단히 약술하여,
해외포교, 특히 그중에도 미주포교를 생각하고 있는 스님들,
재가불자님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펜을 들었다.
미국의 한인 이민역사가 한 세기를 넘어섰고,
미국의 한국불교 전래도 반세기를 지나는 시점이다.
그간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미주 한국불교는
어느덧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나,
아직은 걸음마 수준에 불과한 상태이다.
이에 각 문단에서는 미국 불교의 환경적 특징,
구성적 특징에 대한 장점과 단점 비교를 통한
구체적 해결점을 제시하여 미국포교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번잡하게 꾸미는 글은 버리고,
현실적인 관점으로 보다 명료하게 기술하고자 함을
거듭 밝히는 바이다.
▣ 미국 불교의 환경적 특징
미국은 거대한 나라이다.
경제적 부분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차로 적어도 일주일,
비행기로는 6시간 30분이나 걸리는 큰 나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미국을 미대륙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경제적 부와, 물리적 땅의 크기는
미국인들의 주거환경적 특징을 보다 독특하게 발전시켰다.
뉴욕 맨하탄에는 이미 100년 전
100층 규모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클라이슬러 빌딩 등
동시대에 다른 국가가 상상할 수 없었던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시대에 이미 자동차가 보편화 되어
오래 전부터 미국사람들은 인구밀도가 높고
교통체증이 심한 도심지보다 한적한 교외를 주거지역으로 선호해
미국 도시들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사무지구(다운타운 혹 얼반)
주거지구(업타운 혹 서브얼반)로 구분지어져 있다.
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복잡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시 중심은
오피스 빌딩들과 상점들 그리고 식당들이 모여 사무지구를 형성하고,
차로 약 30분에서 1시간 벗어난 교외에는 예쁜 전원주택들과
현대적인 학교들 그리고 종교단체들이 모여 주거지구를 구성한다.
미국인 중산층 대부분이 마치 토성의 띠처럼 도시를 감싸는 모양으로
위치한 주거지구 서브얼반에 거주하고 있다.
고로 이 서브얼반에는 대중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자가용이 없이는 아예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봐도 무관하다.
한국사찰들도 대부분이 이 서브얼반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이 보편화되어 있는 한국에서 오신 스님들을 매우 당황케 한다.
필자도 중국에서 유학 그리고 유럽에서 몇 개월간 주거해 본
경험이 있어 해외생활에 대한 이해도가 낮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미국 생활방식의 생이함은 상상 이상이어서 큰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장 큰 것이 활동의 제약이 가져오는 불편함이었다.
슈퍼마켓에 물 사러갈 때도 자가용을 몰고 나가야하니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되어 운전면허증도 없고
지리도 익숙지 못한 스님들은 몇 달 동안 고립되어 지내야하는 실정이니
성질 급한 한국사람들에게는 더욱 갑갑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미국은 큰 나라라서 그런지 몰라도
행정처리 속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느리다.
필자는 만만디(느리게)로 유명한 중국에서의 유학생활 경험이 있었지만,
중국보다도 몇 배는 느린 행정 처리에 매사 불만을 토로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선진국답게 모든 일을
철저히 원칙대로 진행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음은 생활양식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개인의 사생활과 공간을 매우 중시하는 미국 생활양식의 특징은
물리적 생활반경은 넓은 반면 실질적 생활반경이 좁다.
다시 말해 모든 생활방식이 자동차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쇼핑몰, 극장, 레스토랑 등 생활편의 시설이 집에서 차로 20~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물리적 이동거리가 멀다.
그러나 미국 대부분 상점들이 이른 시간에 문을 닫고
자동차로 자신이 원하는 곳만 찾아가기 때문에
실질적 생활환경 범위가 아주 단조롭고 좁다.
가족들과 차를 몰고 나가서 외식, 쇼핑하고 들어오는 것이
여가생활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생활이 가족위주로 되어있고
바글바글 서로 몸을 부대끼며 사는 아시아나 유럽과
다른 단조로운 대인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실제의 미국인들의 모습은 헐리웃 영화에서 보여지는
문란하고 게으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매우 가정적이며 부지런하며 어떻게 보면 순진하기까지 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주말의 종교활동은
여가생활이며 정신수양이며 사교활동의 연장이기도하다.
이러한 부분들을 잘 이해하고 대처한다면
미국의 불자들에게 한국불교가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 미국불교의 구성적 특징
미국은 현재 불교가 트렌드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과학적이고 구체적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불교는 동양의 신비한 종교라는 이미지를 넘어
삶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가고 있는 시점이다.
특히 달라이라마 스님,
틱낫한 스님의 법회에는 수만 명의 미국인들이 몰려든다.
미국의 탑가수들의 콘서트도 그 정도 관객을 동원하기 힘든 것을
감안했을 때 실로 어마어마한 사회적 센세이션이라 말할 수 있다.
미국의 아시아 이민자들은 대부분이 마이너리티를 형성하고 있지만,
동양에서 건너온 그리 유창하지 않은 영어를 구사하는 스님들은
미국의 메인스트림을 이끌고 있다.
미국불교의 주류는 당연히 티베트불교이다.
스토리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에게 티베트가 처한 국가적 어려움
그리고 달라이라마라고 하는 위대한 정신적 스승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미국 지식인들 사이에 불교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무지이며
시대를 역류하는 행위로까지 받아들여지기까지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 걸맞게 티베트불교는 사찰의 규모와 조직이 고르고
탄탄하게 발전하여 미국 전역에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반면 한국불교는 뉴욕 원각사, 엘에이 관음사 등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규모 영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현재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소도시 포틀랜드만 해도
한인사찰은 보광사를 비롯하여 3군데에 불과하지만,
한인 기독교 교회는 60개가 넘는다.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도 수천 명에 달한다.
한인 가톨릭 성당은 교회 수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이지만
탄탄한 조직 체계를 바탕으로
작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미사에 참석한다.
반면 한인불교는 법회에 참석하는 숫자가 대형 사찰의 경우
일이백 명, 작은 사찰의 경우 열 명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는 템플스테이를 통해 종교를 초월하여
수많은 이들이 사찰에 찾아오고 전 세계에서 한국 불교와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사찰을 방문하고
심지어 수많은 외국인들이 출가까지 하는 현 시점에 이웃종교에 비해
월등히 고전하고 있는 미국의 한국불교,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온 세계 지식인들이 깊은 감명을 받고 있는
불교의 교리적 깊이가 얕은 것인가?
찬란하게 빛나는 1700년 한국불교의 역사성이 떨어지는가?
그 이유들을 몇 가지 특징을 통해 비교해 보자.
미국의 한국불교는 신도 구성원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는 한국불교이다.
미국 현지인이 중심이 되는 한국불교는
일찍이 숭산 큰스님께서 널리 법을 펼치시어
수많은 미국인 제자를 길러내시고
수많은 미국인 불자들을 제도하심은 워낙 유명한 일이라
굳이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은 숭산 큰스님 열반 후,
그 뒤를 잇는 한국스님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인교포가 중심이 되는 한국불교이다.
미국 사찰 대부분이 이러한 불자들의 주도로 창건되었다.
정든 조국을 떠나와 고된 이민생활에 종교가 그나마 안식처인데,
미국의 한국이민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
미국으로 건너온 많은 불자들도 주위의 권유 혹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심지가 굳은 불자들은 십시일반으로 주택 등을 매입해
부처님을 모시고 몇몇 불자들끼리 신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도중 스님의 부재가 아쉬워 한국에서 스님들을 초청하게 된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오시는 스님들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 번째는 만행,
두 번째는 유학,
세 번째는 해외포교이다.
미국으로 오시는 스님들의 대부분이
“미국이나 한번 가볼까?”식의 충동적 결심으로 오신다.
대개 한국에서의 고된 정진을 잠시 벗어나
쉬신다는 생각으로 오시게 되어 사찰관리에 소홀하시게 되는데
이런 상황이 안타까운 불자들은 잦은 불만을 토로하게 되고
그에 시달리는 스님들은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은 유학 오시는 스님들이다.
공부 목적으로 오시게 되지만 경제적 어려움,
합법적 신분유지의 어려움 등으로 대부분이 6개월을 넘기지 못하나,
그런 부분들이 해결되어도 불자님들의 기대와 스님의 목적이
마치 평행선을 달리듯이 공부를 목적으로 오신 스님은
사찰 일에 소홀히 하게 되고,
불자님들은 그런 스님들이 섭섭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님들이 학위취득 후
한국으로 귀국하시기 때문에
남겨진 교포 불자님들은 서운한 마음을, 일종의 배신감을 가지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해외포교 목적으로 오시는 스님들이다.
미주로 오시는 스님들 중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이다.
실로 뉴욕 원각사의 창건주이신 법안 큰스님께서는
한국에서도 수행력으로 널리 알려지신 큰스님이셨고,
도미渡美 후에도 한국스님 최초로 미국 최고의 명문사립 뉴욕 대학교에서
석사, 박사를 취득하신 100년에 한 분 나실까말까 한 큰 어른이셨다.
학업과 불사를 병행 하시면서
업스테잇 뉴욕에 250에이커(약 30만평)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부지를 매입하시어
미국의 한국불교 포교에 새 역사를 쓰셨으나
안타깝게 병마로 인해 부지 매입 후
계획하신 불사를 이루지 못하시고 열반에 드셨다.
그러나 구룡사 회주이신 정우 큰스님께서
뉴욕 원각사 중흥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시지 않으셨고
서울 구룡사와 일산 여래사 등
여러 한국 불자님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로
원각사는 불과 3년 만에 정상궤도에 올라섰다.
뉴욕 원각사 주지이신 지광스님과
원각사 불자님들의 노력으로 대작불사 모연 2주 만에
270만 달러(한화 약 30억)를 모금해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고 있으며,
현재는 한국 전통방식의 대웅전과 납골당 건립을 진행 중이다.
뉴욕 원각사는 큰 스님의 원력과 불자들의 노력으로
원만히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소규모 사찰들에 부임한 스님들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오신 스님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의욕이 넘치시어
여러 가지 일들을 추진하지만, 법이 까다롭고 행정처리 과정이 복잡하고
긴 미국의 시스템에 대부분 스님들께서 높은 벽을 느끼게 된다.
그 과정 중 미국에 적응되어 있는 교포불자님들과
일을 한국식으로 진행하는 스님들 사이의 견해차이로
소통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는 미주에 건너오신 스님들과 교포불자들 간에
공통분모가 없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스님이 원하는 도량과 불자들이원하는 도량에
교집합 점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마힐 거사의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유마경에는 ‘중생이 아프기에 내가 아프다.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면 내 병도 낫는다.’는 구절이 있다.
미국으로 건너오는 한국 이민자들도 계속 줄어들고
그나마 미국의 교포들도 2세대 3세대를 넘어서면서
더 이상은 한국적 정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민 1세대들의 가슴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는
한국 절집의 고즈넉함이 더 이상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K-POP에 열광하는
2세대 3세대 교포들이지만,
그들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이다.
그들에게는 고민을 함께 덜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과 소통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의 언어로….
▣ 미국포교의 해결방안 모색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은 이제 스님들이 전법에
신명을 걸지 않아도 도미노처럼 번져 나간다.
과학의 발전과 21세기 들어 개발된 인터넷은
마치 불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불교의 위대함이 증명되고
인터넷이 발전할수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빠르게 번져나간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은
세계 각개 국어로 번역되어 컴퓨터만 켜면 읽을 수 있고,
세계 각국의 큰스님들 법문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
그야말로 불국토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미주포교의 키포인트는 조직화, 체계화에 있다고 본다.
지난 50년간 우후죽순처럼 미국에 한국사찰들이 난립해
양적인 성장은 있었으나, 미국으로 이주하신 스님들의
한국과 물리적 거리로 인한 종단과의 소통두절,
언어의 어려움으로 인한 고립 등으로 조직화,
체계화에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소통에 물고를 틔어,
현 종단의 선진화된 우수한 조직체계를 적극 수용,
현지 포교를 맡아온 스님들의 실무 노하우를 합쳐
더욱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해법이라 할수 있겠다.
좋은 선례로 조계종 미 동부 해외특별교구 설치를 들 수 있겠다.
종단의 지원과 뉴욕 사암연합회 스님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미 동부 해외특별교구 출범 후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포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동부스님들은 잦은 교류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종단과의 소통도 활발히 하여 연대감을 형성해 미주 한국불교
포교의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가고 있다.
이에 비해 서부는 아직도 구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미국 서부야말로 한국 불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L.A에서 시애틀까지 서부 해안은 한국 교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고,
L.A를 중심으로 하는 사찰들은 규모면에서도
동부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우위에 있다.
그러나 미동부에서는 이미 해외특별교구가 설치된 반면
L.A에서는 이렇다 할 행보가 없다.
빠른 인식전환으로 서부에도 하루빨리
해외특별교구가 설치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바로 인재고갈 현상이다.
한국에서도 출가자의 수가 점점 줄어
사찰은 많은데 스님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스님이 절실히 부족한 미국에서는
더욱 크게 와 닿게 된다.
소위 문 닫는 절들이 일 년에 몇 군데씩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바와 같이 여러 가지 환경적,
구조적 어려움들이 많기 때문에 무턱대고
미국으로 스님들을 파견하는 것은 반대다.
필자의 경우 좋은 인연으로
미국에서의 문화차이를 빠른 시일에 극복할 수 있었으나,
많은 스님들께서 미국에 좋은 뜻으로 오셨지만,
마음에 상처를 안고 떠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먼저 종단차원에서
해외파견스님들 연수과정을 설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먼저 한국에서 미국 현지생활에 관한 정보, 비자발급 등에
대한 교육을 약 2주에서 4주간 시행하고,
미국 현지에 상설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짧게는 4주 길게는 8주정도
미국 현지적응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면 한다.
한국스님들의 숭고한 해외포교의 뜻을
흐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렇게 오신 스님들께서 열심히 포교를 하신다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겠으나,
불자들과의 마찰이나 개인문제로 인해
불교 전체에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면,
현지에 남아 있는 스님들이 절대적으로 그 과보를 받게 된다.
이는 같이 해외포교를 하는
스님으로서는 아주 맥 빠지는 일이다.
스님들과 불자들의 관계는
법당의 기둥과 지붕의 역할이라고 본다.
아무리 부처님께서 원만히 모셔진 법당이라 해도
기둥이 없으면 건물이 일어설 수 없으며,
지붕이 없으면 비를 맞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겪었던 문화차이 등의 어려움들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쉽게 보이지만 한없이 어려운 것이 해외생활이다.
한국의 매체들이 서구권의 모습을 너무 예쁘게 포장하여
한국인들의 깊은 내면에 해외생활에 대한 동경이 있다.
드넓은 초원, 여유로운 생활….
지구상 어디에도 그런 낙원은 없다.
선진국일수록 생활비가 많이 들고
세금 또한 많이 걷기 때문에 생활이 아주 빡빡하게 돌아간다.
특히 미국은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간단한 배관수리도 시간당 최소 200달러(인건비) + α(자재비)를
줘야하기 때문에 사찰에 전등만 잘 안 켜져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헐리웃 영화를 통해 알고 있는 미국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달콤한 환상에 사로잡혀 오시는 분들은 3개월 안에 포기하고
돌아가게 된다. 한국에서는 존경받는 스님일지 몰라도
미국 사회에서 보는 스님들은
그저 한명의 아시아 이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높은 물가와 바쁜 일과에 쉽게 지쳐버릴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목적을 가지고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무너진다.
아무쪼록 해외포교 특히 미국포교에 관심 있는
스님들이나 재가불자님들께서는 반드시 사전에
철저한 조사와 이해를 통해
포교의 원력을 실천하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린다.
{월간붓다, 2012년 9월호 개재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