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진실해야된다

종교는 진실해야된다

본인의 지론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윤활유적인 요소와 비타민적인가
종교 아닐까 그런데 종교는 진실이라고
했다. 여러분 한문에서 보면 소설(小說)은
작은 이야기고 그러나 시(詩)는 말씀언변에
절사로 사원에서 전해지고 사원에서 나누는
가르침 그런 말씀들이 다 詩다 지역적으로
봅니다.

우리속담 “침묵은 금이다”라고 하지만 러시아
한 책에서는 “침묵은 진실이다”라고 되여 있다.
침묵과 금과 진실을 함수관계를 들여다보면 우리
속담의 금이라는 말은 99.99% 금이라는 것은
0.01%가 이물질 이라는 것 이것이 진실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에서 지향하고 종교에서
이뤄지고 있는 말은 있는 현상을 여러분들에
보여주고 있다. 마치 정직한 사람이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가르친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고 있는 모습을 생로병사로 보고 있다.

외형적으로 들어나는 것은 우리가 뭐라 진단 할
수 있겠습니까만 불교에서는 늘 무상하고, 괴롭고
나는 나의 실체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른게 아니라 우리성품 가운데 늘 한결
같이 이루어져야 되는 상일성 이라고 하는 일관된
성품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변덕과 시기와
분별력(자기 좋은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런 것 하고 주제성 내가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이기 때문에 내가 무상
한 것이고 괴로워 것이고 실체가 한결같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 할수있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여러분들에 전해 주고 싶은 진실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변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크든 작든 다 괴로움이다 우리는 괴로움
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기도고, 정진이고, 수행이다 그러기 위해서 꼭 가져야
될 네 가지가 있다.

선행 되어야 할 네 가지는
첫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싫증
내지 아니 해야 한다.
둘째 가르침을 늘 바르게 관찰하고 생각 사유해야
한다.
올바른 사유가 필요하다.
셋째 가르침을 따라서 능히 실천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큼 만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넷째 깨달음에 회향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불교를 믿는가, 왜 종교는 진실
하다고 말하는가, 진실이란 것은 정직한 사람이 성
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우리가 종교를 가진 다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되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전 말 중에 침묵은 특히 무관심한 침묵은 형벌이다.
우리는 여기서 접근해 보아야 할 것은 무관심 하면
일체 말이 없다.
부처님께서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열어서
보여서 깨달음으로 들게하는 것이 팔만대장경
이다. 현성인 들이 제자나 민초들에게 株고 싶
었던 가르침이 개시오입(開示悟入) 그 품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넉넉함과 여유로움 속에 따뜻함을
가지면서 살수있는 그러한 길을 보이신 것이 아닌
가 그래서 이런 것들을 알고 느끼고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생활화 된다면 무엇 어찌 후생을
걱정하고 다음 걱정 할게 있겠는가

늘 말 중에 불교에서는 본전치기만 해도 어디로
오는가우리는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
불교인 이기 때문에 진과(선인선과, 악인악과)
선하게 살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쁘게 살면 반드
시 나쁘게 나타난다는 것 윤회란 무엇인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당 육도를 업력에
위해서 늘 변화 되어지는 자기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윤회설이다.

대 비바사론에 보면 어두운 방에 여러가지
물건이 있다고 해도 등불이 없으면 어두움에
가려지면 아무리 눈이 밝아도 볼 수가 없다.
삼각관계가합일점을 찾아야 빛과 물건과 눈이
있어야 물건을 찾을 수 있다.

어느날부터 사라지고 있는 구호 중에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이것을 응용해서 우리 것
으로 만들러 보면 내 스스로가 내관사유 하면
서 늘반복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 확인하고
다짐하고 인식 하는 것 이런것이 있어야
아침에 가르침 받고 깨달음을 얻어서 저녁에
생을 마감한다 해도 우리는 후생을 걱정 할
일은 없게 되는데 그러지 못한 상태에서 전개
되고 비롯되는 것을 망망대해에 표류하고 있는
내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는 것 한번 살
펴 볼 일이다.

비록 지혜가 있어도 남을 쫓아서 가르침을 듣지
않는 이런 사람은 선과악의 뜻을 분명하게 분별
하지 못한다. 불교대학에 강의 중 장님과 등불
이야기와 또 다른 가르침 낮 과 밤의 논리를 보면
우리는 밝았을 때는 이점이 이다 눈이 있기 때문
에 그러나 밝음 속에서 눈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교만하거나 우월주의에 사로잡히지말아야 하는
가르침 같은데 어두운 밤 칠흑야밤 낮이나 밤
없이 살아가는 장님은 낮이나 밤에 똑같이 걸어
가지만 우리들은 낮에는 그분들 보다 낫게 걷고
있지만 어두운 장야의 밤에서는 우리는 익숙한
장님의 발걸음을 따라갈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분에 도움을 받아서 그 터널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중생들은 그렇게 않는다. 한번 밝은 낮에 자기
모습을 영원한 자기모습으로 집착을 하면 그
나머지 상대에게는 쉬게 되어버리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 그러나 세상은 모두가 완전 할 수는
없다. 눈이 어두운 이는 귀라도 밝아지고 말을
못하는 이는 눈이 밝아지고 또는 손재주
와 눈치가 비상하게 보이는 것을 우리는 일상적
으로 봅니다.

사실 말법시대에는 자기 좋은 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진실로 가르침
을 듣기 어렵고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친히
보고 듣고 알도록 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주신
것이 흔들림 없는 모습 속에서 살아 된다는
말씀이 아닌가, 아무리 부처님의 말씀이나
현성인 들의 가르침이 좋고 좋다고 해도
적절하지 못하면 무주공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인식을 같이 해보자는 것
그래서 종교는 진실해야 하고 그 진실이라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충분히 소화 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어야 하지 아닐까, 화엄경 입법
계품에 보면 선재라는 순수한 영혼을 통해
많은 이들을 찾아 다니다 처음으로 만난 분이
문수보살부터천신만고 끝에 미륵보살까지
만났다. 미륵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이야기
하기를 진정한 보리심을 일으켜 다면 다시
백이십 생 오십 이분을 만나는 동안에 백이십
생을 살았는데 처음 만난 문수보살을 만났을
때 지금 묻는 문제를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런데 순수한 영혼과 믿음의 뿌리가 깊은
선재가 예하고 뒤로 물러섰을 때 그 즉시
문수보살이 백이십 생 밖에서 손을 내밀어서
선재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시 말하면 진리라는 생명의 공간 안에는
시공을초월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셨으면 한다. 그러면서 거기서 문수가 선재,
선재라 장하고 장하구나, 선재여 네 선근이
약했던들 하나도 진실된 것이없었을 것인데
백이십 생을 살고도 미륵의 그 한마디에 초심
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게 다고 하는 마음
은 바로 하나와 전체가 둘이 아닌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가르침이요 최후의 일념까지도
진실한 생각 속에서 있으니 참으로 장하고
장하구나, 우리는 요즘 착하게 살면 손해를
본다고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나 또 물질적
으로 이야기되는 것이다 부처님도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없다. 절대로착하게 살아서 손해보지
않고 나눔을 통해서 손해보지 않는다.

우리는 보조스님의 말씀 중 땅에서 넘어진 자들
이어 땅을 딛고 일어서라 힘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의 위탁을 해서한다.짚어야 지팡이가 필요
하면 지팡이를 짚어야 하고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할때 는 땅을 딛고 스스럼 없이 일어설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 용기 있는 삶이요 지혜 있는
삶이요 힘이 있는 삶에 현장에 어울림을 가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여러 불자님 들에 드리고
싶습니다.

‘상처’라는 전호성님의 시
비 오는 날에는 빗방울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 오는 날에는 눈송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비 그치면 햇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상처 내면에 깔린 그 속뜻이 우리들
모두모두 생각 속에 다 간직되어 있는 상처
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여러분 들께 들려
들었다. 내가 지금 실제로 남들의 고통을 떠
맡아을 수 있는 현실에 처해서 살고 있을 수만
있다면 누군가 질어져야 될 그 짐을 내가
질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이 사실이 멋진가,
아름다운가 그런 생각을 행동할 수 있는 나라면
얼마나 멋진 인생을 살고 있음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삶이 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