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근본사상
    이 름 : 운영자 등록일 : 200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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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本佛敎思想

第 1 節 붓다의 生涯

붓다는 B.C 600~500 년 사이에 현 네팔에 있었던 카필라왕국에서 숫도다나왕과 그의 부인인 마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姓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다였다. 그를 붓다, 釋迦牟尼, 또는 釋尊이라고 부르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이름이다. 한 나라의 太子로 태어난 싯다르다는 세속에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고뇌하였다. 한 佛典은 그의 고뇌를 이렇게 전한다.

인생은 태어났다가 결국은 병들어 죽고 마는 것 ! 어머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님도 또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아아 인생은 허무하고 괴로운 것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수렁이 우리의 앞을 막아서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은 마치 불붙어 타고 있는 집에 있는 고통과 같았다. 방안이 불붙고 옷깃에 불길이 닿을 때 오직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뛰쳐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현실의 한계상황을 초탈하는 것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고 죽는 문제, 늙고 병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求道의 길을 택하였다. 그 길은 일체를 버리고 혼자 가는 외로운 出家의 길이었다. 왕궁을 떠나 출가한 구도자로서의 싯다르다는 오랜 수행 끝에 서른 다섯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 이때부터 45년 동안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깨달음의 길, 진리의 길을 전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첫째로 어떤 사람이나 깨달음을 얻으면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神이나 신의 아들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實相을 깨우친 覺者이었으므로 진리에 대한 독단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깨친 진리는 그가 있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항상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둘째로 그는 해탈의 길을 먼저 걸었던 사람으로서 같은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안내자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예배의 대상이 아님을 강조하고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였다. 셋째로 그의 가르침은 人間苦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이었다. 훌륭한 처방이 병의 증상과 환자의 체질에 따라 다르듯이 그의 가르침은 듣는 사람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 다르게 행하여졌다. 넷째로 그의 가르침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空論을 배격하고 과거나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를 강조하였다. 다섯째 그는 신과 인간과의 건널 수 없는 江을 전제하는 서양종교와는 달리 붓다와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하였다. 또 당시 브라흐만과 수드라 등으로 계급을 나누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반대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였으며 여성의 출가도 허용하였다. 끝으로 그는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 속에 있으며 의지할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임을 강조하였다. 팔십에 入滅하기 전에 제자에 준 마지막 가르침은 이것을 증명한다. 너희들은 자기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세워진 自力宗敎의 모습이고 인간의 길, 자기형성의 길을 걸었던 붓다의 참모습이다.


第 2 節 불교의 근본사상

1. 緣起說

붓다의 가르침은 깨우침을 근본으로 한다. 그의 가르침은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고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길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불교의 근본 사상을 알기 위하여는 붓다가 깨우친 내용이 무엇인지를 일아볼 필요가 있다. 한 經典에서는 그의 깨달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으로 진지하게 사유한 끝에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의혹은 씻은듯이 사라졌다. 緣起의 法을 알았기 때문이다.] 붓다가 문제삼았던 늙고 병들고 죽는 의혹을 해결하였던 깨달음의 내용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본법칙이었다. 그 법칙을 붓다는 연기라고 하였다. 연기라는 말은 Paticcasamuppada로 Paticca(말미암아)와 Samuppada(일어나는 것)의 합성어로서 [말미암아(緣) 일어나는 것(起)]이라는 뜻이다. 연기는 보통 타당성있는 객관적 진리라고 하여 법(dhamma)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도 한다. 연기의 의미는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 소멸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과 관계없이 홀로 생긴 것이 아니고 1) 공간적으로 고립하여 있지 않고 [더불어] 있으며 2) 시간적으로 연기적 관계에 있고 3)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상관관계에 있으며 4) 따라서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이며 그럴만한 조건이 없어지면 그 존재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상호 관련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관계 변화하는 법칙이 있어서 이 법칙에 따라 생성소멸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이 변화하는 법칙을 연기라고 하는 것이다. 연기란 다른 것과 관계하여 일어나는 현상계의 존재이다. 모든 현상은 반드시 그것이 일어나게 될 조건과 원인 아래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어떠한 원인과 조건에서 어떠한 현상이 생기고 또 멸하는가 하는 현상의 움직임에 관해 바른 지식을 가지면 그 현상이 움직이는 법칙에 따라 욕심내지 않고,좋지 않은 현상을 제거하고 바라는 좋은 현상을 실현시킬 수가 있다.

2. 十二緣起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의 법칙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습을 밝히는 보편적인 존재의 법칙이며 이것은 불교의 기본사상이다. 이러한 존재의 법칙인 연기설을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에 고통받는 인간에게 적용하여 그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 십이연기이다.

1) 無明

무명이란 밝음이 없다는 것이다. 밝음이란 곧 지혜로서 사회 인생의 진리에 대한 지혜요, 바른 세계관 인생관이며, 결국 그것은 연기의 도리를 아는 것이다. 무명이라는 것은 이러한 지혜가 없는 것으로 고뇌 불행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갖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2) 行

행은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행위는 의식에 의한 사고작용과 말에 의한 언어작용과 신체에 의한 동작의 세 가지로 구별된다. 그 경우 행위는 선과 악의 의지를 수반하고 있다. 때문에 잘못된 행위는 잘못된 사고, 그릇된 지혜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행위에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거짓말, 이간질, 살생, 도둑질, 간음 등이 있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무명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3) 識

식은 행위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 인식 판단의 의식 작용으로서의 식과 인식 판단의 주체로서의 식이 있다. 인식 판단의 의식 작용에는 오관(五官)에서 온 것과 의식에서 온 것이 있다. 전자를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 (身識)의 전오식(前五識)이라 하고, 후자를 의식(意識)이라 한다. 둘을 합하여 육식(六識)이라 하고 전자는 감각 작용이고, 후자는 지각작용 및 추리, 상상, 기억, 판단 등의 일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4) 名色

명색은 식의 대상으로서 인식된 물질(色)과 정신(名)이다. 즉 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모든 것이 명색이다. 따라서 명색은 육 식의 대상으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의 육경(六境)을 말한다.

5) 六處

식의 대상인 명색을 인식하고 판단하기 위하여는 감각과 지각의 기관, 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능력이 있는 기관이 육처로 육처는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의 육근(六根)이다.

6) 觸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 화합 접촉하여 일어나는 감각 작용이다. 그것은 감각과 지각의 인식 작용 과정에 있어서 근(감각과 지각의 기관 또는 능력)과 경(대상)과 식이 접촉하는 것이고, 또는 접촉한 상태를 말한다.

7) 受

촉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 고(苦), 락(樂)등의 감수 작용이다. 수에는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가 있고 이를 다시 육체적 정신적인 방면으로 나누어 우(憂), 희(喜), 고(苦), 락(樂), 사(捨)의 5수라고도 한다. 이 3수와 5수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苦 ----------- 苦

| 憂 肉體的

三受 -----+-樂 ----------- 樂

| 喜 精神的

+-不苦不樂------- 捨



말하자면 고락 등을 육체적 감성적인 것과 정신적 지성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고에도 락에도 속하지 않는 감각과 감정은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이다.감성적인 고락은 신경에 의해 좌우되는 객관적인 것이고 정신적인 것은 사람의 감수성에 따라 다른 주관적인 것이다.

8) 愛

애는 잘못된 생각에서 일어나는 맹목적 사랑이다. 고뇌가 일어나는 근본원인은 무명이지만 그 직접적인 원인은 애다. 애에는 욕애(欲愛)와 무유애(無有愛), 유애(有愛)가 있다. 욕애는 감각적 애욕, 특히 성적인 애욕을 말한다. 유애는 죽은 뒤에 행복한 세상에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윤회에서 벗어나 완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애는 고락 등의 감수 작용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거기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미움도 강렬하고 맹목적인 것이 된다.

9) 取

취는 사랑과 미움의 생각에 의하여 사랑하는 것은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미워하는 것은 버리려고 하는 취사선택의 행동이다. 이러한 취사선택의 행동을 業이라고 하는 것이며 우리의 선악의 행위는 이렇게 하여 생기는 것이다.

10) 有

유는 존재를 말한다. 존재에는 선악의 행위로서 존재(업유)와 그 업에서 맺어지는 고락 등 결과로서의 존재(報有)가 있다. 우리의 행위는 행위경험과 행위경험이 축적된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유란 잠재력만을 말한다. 왜냐하면 선악의 행위는 애요 취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현존재는 과거 행위경험의 축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존재가 유가 된다.우리의 인격이나 성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현존재로서의 인격이 기본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다.

11) 生

유는 그 사람의 미래를 규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하여 미래의 생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생은 죽음 뒤에 오는 내세의 생이라고 할 수도 있고,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그 사람의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과 같은 부분적인 경험에서도 이를 하나의 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 경험의 총화로서 잠재력인 유에 의해 규정되고 좌우되는 것이다.

12) 老死

우리들이 존재하게 되면 반드시 늙음과 죽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노사란 늙고 죽는다는 사실보다는 늙음과 죽음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노사는 우리들이 받는 모든 고뇌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뇌는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에서 결과되는 것으로 그것에 의해 잘못된 경험이 쌓이고, 그것이 잘못된 욕구나 행동 때문에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그것이 불안과 고뇌를 안겨주는 것이다. 이렇게 無明으로부터 生死의 괴로움이 연 기하게 되는 과정을 流轉門이라고 한다. 무명으로부터 생사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면 생사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은 무명을 없앰으로서 가능하다. 무명을 滅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육처가 멸하고, 육처가 멸하면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면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하게 된다. 이렇게 무명의 멸로부터 괴로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還滅門이라고 한다. 유전문이 생사의 윤회하는 과정을 말한다면 환멸문은 윤회로부터 해탈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십이연기설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인 생사의 문제, 그리고 괴로운 실존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그를 극복하는 길을 해명하고 있다. 즉 십이연기설에 의하면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죽 음과 괴로움은 결국 진리에 대한 無知로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괴로움의 극복은 어둠을 밝음으로, 무명을 지혜로 대신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심리적 생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이연기설이다.

3. 三法印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의 법이 모든 존재하는 것의 상대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 연기의 존재법칙에 입각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속성을 구체화한 것이 삼법인이다. 이는 세가지의 진실된 가르침이란 뜻으로, 印이라고 한 것은 도장(印)이 언제나 거짓이 없듯이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그 세가지는 諸行 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을 말한다. 첫째 제행무상이란 모든 것(제행)은 부단히 변화하고 결코 동일성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해와 달도 끊임없이 운동을 하고 초목과 짐승도 끊임없이 생장과 소멸을 거듭하고 사람도 역시 변화를 거듭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일반화하여 현상계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계의 원리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변화의 실체를 현상의 이면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둘째의 제법무아이다. 제법은 제행과 같이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무아의 "我"는 항상 동일성을 보유하여 자기의 힘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아란 모든 것은 변화하므로 동일성을 가진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변화의 이면에 변화하지 않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제법무아의 의미이다. 모든 것들은 그 자신에 의하여 존재할 수 없으므로 다른 것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 다른 것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연기 인과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그대로 보지 않고 실체적 동일성을 인정하려고 하나 현실적 경험과의 모순, 욕망과 현실과의 충돌, 여기에서 얻어진 불만이 쌓여서 고뇌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고뇌를 없애려고 한다면 먼저 실체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실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실체를 고집하지 않게 되고, 고집이 없어지면 고뇌도 없게 된다. 이 고뇌가 없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 이것이 세째의 원리인 열반적정의 뜻이다. 그것은 고뇌가 없이 마음이 안정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의 이상인 해탈의 경지이다. 이 열반적정의 경지는 첫째와 둘째의 원리를 바르게 인식한다면 실체에의 고집이 없어지고, 고집이 없어지면 고뇌가 없어지게 되어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은 진리의 인식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다.

4. 四諦說 연기설이 스스로 깨닫기 위한 것이고 이론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사제설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고, 이론적임과 동시에 실천적이며 오히려 실천을 주로한 것이다. 諦는 진실, 진리라는 뜻이고 사제는 네 가지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고제(苦 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 고제는 변화무상한 현실세계에 대한 인간들의 주관적 가치판단을 말한다. 인간들은 변화무상한 현실에서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을 찾고 바란다. 이것이 인간들의 미혹이다. 그러나 세계는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욕구는 이루어질 수 없고 그 때문에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고통에는 생고(生苦), 노고(老苦), 병고(病苦), 사고(死苦),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의 여덟 가지의 고통이 있다. 오온(五蘊)은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색(色;물질로서의 육체), 수(受;감각 감수작용), 상(想; 관념, 사상), 행(行; 의지, 선악행위의 동기가 되는 내적 정신작용), 식(識; 인식판단의 의식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집제는 인간이 번뇌하는 원인으로 번뇌는 갈애(渴愛)로 말미 암아 생긴다. 갈애는 인간으로 하여금 타율적이고 비자주적인 생 활을 하게 한다. 이 갈애의 원인은 무명(無明)이다. 고제는 번뇌의 결과로 미혹을 말하는 것이고 집제는 미혹의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고제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욕구하고 집착하여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번뇌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것의 원인을 밝혀 해탈의 길을 말하는 것이 멸제이다. 멸제는 인간이 미혹으로 말미암아 생긴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을 가르친다. 열반은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욕망을 끊어 자유로운 정신적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즉 인생고의 원인인 미혹과 무명을 끊어 자각없는 현실 세계의 고뇌와 불안을 멸 한 상태로 불교의 이상경이다. 도제는 멸제의 목표인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말한다. 그것은 불교의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열반에 이르는 것은 쾌락의 추구나 고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도(中道; 非苦 非樂)를 행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방법이 팔정도(八正 道)이다. 팔정도는 정견(定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다. 정견이란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으로 불교의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라든가 사제에 관한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즉 정견에 의하여 얻은 바른 생각을 실행하려는 마음으로 나쁜 마음, 탐욕스러운 마음,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 등을 억제하려는 심적 작용이다. 정어는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거짓말이나 남을 비방하는 말,난폭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정업은 바르게 행동을 하는 것이다. 소극적으로는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선행을 하는 것이다. 즉 살 생을 하지 않고 색욕과 음주에 빠지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 정업이고, 남을 사랑하고 스스로 반성을 하여 바른 행위를 하는 것은 적극적 정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정명은 규칙적 이고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정정진은 올바른 노력과 용기이다. 마음을 바로 하여 안일과 나태함을 꾸준히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정념은 끊임없이 스스로 반성하고 자각하여 자기와 주위의 입장을 올바로 아는 것으로 올바른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정은 정신을 통일하여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진정한 정신통일의 상태를 말한다. 이 四諦는 마치 의사가 병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과 같다. 즉 병을 진단하고(苦), 병의 원인을 밝히며(集), 병이 완치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滅), 처방(道)을 내리는 것이다.